OMF 계간지 봄호를 읽으며....
OMF 계간지가 조금씩 늘어나고 있다. 1~2년 정도 되었을까? Y 교회에서 언젠가부터 좋은 친구와 격려자가 되어 주신 C 선교사님 덕분에 OMF 계간지가 집에 배송되어 오고 있다. 이 책을 받으면서 언젠가부터 그냥 반갑고, 정성어려 만드셨을 계간지와 기도책자를 다 소화하지 못하고 계절이 지날 때면 죄송한 마음도 올라온다. 한편, 이번에는 좀 더 기간 안에 나누어 보고, 월별 기도제목을 읽으며 기도하는 습관을 만들고 싶어진다.
Y 교회의 선교보고 때 허락되었던 감동이 리마인드 되었던 것일까? 지금 이 책을 보고 당장 내가 실천할 수 있는 일도 없을텐데 이 책을 받으면 좋은 이유가 무엇일까? 마음 깊은 곳에서 일렁이는 그리움과 아련함은 무엇일까?
어젯밤, 이 책을 펼치며 읽었던 글들이, 내게 주옥같은 글귀로 다가와 어딘가에 남기고 쓰고 되새기고 싶었다. 하나님을 예배하다, 기도하다, 다시...기도를 멈추다가 생각치 못한 일을 당하며 다시 기도하며 버티는 신앙에서 선한 싸움을 싸우는 신앙인으로 서고 싶도록 해 주시는 새로운 교회 설교 말씀을 통한 작년 말, 올 해 초의 마음이 연결되는 느낌이였다.
공베드로 선교사님의 '그대는 땅 끝 사명자라' 글의 꼭지가 자정을 넘은 새벽 시간 마음을 울렸다. 새벽이 되어 일어나는 감정적인 동요 때문일까? 그렇다고 하기에는 마음에 주신 감동이 적지 않았다. 때로는 고요하고 안정적인 일상에서, 그 안정을 내려놓고 다른 곳을 바라보라고 도전하시는 하나님의 음성 같았다. 굳이 비집지 않고 들어가도 되는 관계망으로 들어가서, 이야기하지 않아도 되는 것을 이야기하며, 사람의 마음을 얻으라고 하시는 것 같았다. 스스로 오지랖을 부리다가 후회를 하며, 내가 지고 싶은 짐을 내가 질 수 없으면 멈추어야지를 덕이라고 생각했던 내게, 또 다른 차원으로 초대하시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나 기억해야 할 다른 차원도 분명히 존재함을 기억한다. 나의 행동이 정말 주님의 재림을 기다리기에 하는 것인가? 아니면 나의 의가 드러나고자 하는 것인가? 그리고 주신 감동을 다시 확인하며 정말 하나님의 말씀은 어디를 향하고 있는지, 필터링하고 싶어진다.
주님 말씀하시면 내가 나아가리다. 주님 뜻이 아니면, 내가 멈추어서리라.
주님께 묻고 여쭙고 순종하는 마음으로 한 걸음을 뗍니다. 이것이 아니라면, 주의 길을 깨닫게 하소서. 주님께 나아가고 싶어진다. 주님, 말씀하소서.
● 종말은 두려움이 아니라 복음의 완성이다.
누군가는 말한다. "지금이 마지막 때가 아니냐?" 거리를 가득 메운 전쟁의 소식, 기후 변화로 인한 재난, 서로 반목하는 민족과 나라들, 성경에서 예언된 종말의 징조들이 현실이 되는 듯하다.
그러나 예수님은 우리에게 종말을 두려워하지 말라고 하셨다. 그분은 마지막을 두려움의 시간으로 정의하지 않으셨다. 오히려 복음이 모든 모든 민족에게 전파될 때, 그제야 끝이 온다고 말씀하셨다.
종말을 논하며 두려움에 사로 잡히는 것이 아니라, 복음의 완성을 위해 걸어가는 것. 이것이 땅 끝 사명자의 첫번째 자세다.
그는 세상의 흔들림에 놀라지 않는다. 오직 복음이 닿지 않는 곳을 바라며 나아간다.
● 땅 끝에서 다시 오실 주님을 기다리는 자
예루살렘 성전이 무너진다는 예수님의 말씀에 제자들은 놀라며 물었다. "그 때가 언제입니까?" 그러나 예수님은 날짜를 말씀하지 않으셨다. 대신, 복음이 땅 끝까지 전파되어야 한다는 명령을 주셨다. (행 1:9)
사람들은 예루살렘을 떠나기 싫어했다. 익숙한 곳, 안전한 울타리를 벗어나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복음은 그들을 밀어냈다. 유대에서 사마리아로, 사마리아에서 로마로, 그리고 땅 끝까지.
땅 끝이란 단순히 지리적인 공간이 아니다. 그것은 아직 복으밍 닿지 않은 모든 것을 의미한다. 땅 끝 사명자는 그 곳에서 주님의 재림을 기다린다. 하지만 그는 단순히 기다리는 자가 아니다.
그는 나아가는 자다. 복음을 들고, 기도하며, 주님의 다시 오심을 준비하는 자다.
● 복음을 전할 때 또 다른 사명자가 일어난다.
요나는 니느웨로 가기를 원치 않았다. 그 곳은 이스라엘의 적대국이였고, 그들이 회개하는 것을 바라지 않았다. 그러나 하나님의 뜻은 달랐다. 요나는 억지로 니느웨에 가서 외쳤고, 놀랍게도 그 성 전체가 회개했다. (욘 3:5)
복음은 결코 혼자 움직이지 않는다. 한 사람이 땅 끝에 가서 복음을 전하면, 또 다른 사명자가 일어난다. 땅 끝 사명자는 홀로 걷는 자가 아니다. 그는 또 다른 자를 일으키는 자다.
그가 가는 곳마다 복음의 불꽃이 타오른다. 작은 불씨가 또 다른 불씨를 일으키듯, 그의 헌신은 새로운 사명자를 불러일으킨다.
땅 끝 사명자는 홀로 걷는 자가 아니다. 그는 또 다른 자를 일으키는 자다.
● 희생적인 사랑으로 살아가는 자
복음의 길에는 희생이 따른다. 편안함과 안정을 내려놓아야 한다. 허드슨 테일러는 첫 사역 약 7년이 지난 다음 건강 상태가 심각해졌다. 그는 의사의 경고를 받고 본국으로 철수한다. 요양 중에도 그의 기도는 쉬지 않고 물었다 "제가 해야 할 다음 일은 무엇입니까?" 라고,
또 오스왈드 챔버스는 전쟁터에서 군인들에게 복음을 전하다가 43세에 생을 마감했다. 그는 물었다. "지금 복음이 필요한 곳이 어디인가?" 그리고 그는 그 곳으로 갔다. 또 땅 끝 사명자는 위험을 피하지 않는다. 그는 하나님이 원하시는 곳으로 간다 사람들이 가지 않는 곳, 두려워하는 곳, 외면하는 곳. 그곳에서 그는 희생적인 사랑으로 살아간다.
그는 복음을 말로만 전하지 않는다. 그의 삶 자체가 복음이 된다.
여담으로 산뜻한 표지를 보면 기분이 좋다. 파스텔 톤에 계간의 주제를 표현한 일러스트가 경쾌한 느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