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를 부인하는 삶이 사랑 없이 지속될 땐 율법에 의한 건조하고 지루한 삶이 계속된다는 생각이 든다. 나도 모르게 그렇게 흘러갔던 시간이 있었다. 그러다 십자가에서 죽는 삶이 하나님께서 만드신 나를 발견하는 것과 상충하는 것이 아님을 깨닫게 되며, 하나님 안에서 나를 발견하고 싶은 마음이 새롭게 피어났다.
그 중 발견했던 생각들은
건축을 하고 싶었다. 그 모습과 형태가 어떤 것인지는 그렇게 중요치 않다.
공부를 하고 싶다. 이 시대 상황 안에서 성경을 구현하는 삶이 무엇인지 알기 위해, 실천하고 싶은 작은 바램에.
그리고 덕이 없는 지식은 무익하지만 지식이 없는 덕 역시 힘이 없음을 느끼게 된다.
동화를 써 보고 싶다
...
나아가
요즘엔 글씨(캘리그라피)를 쓰고 싶다
등 바램이 차오른다. 그런 마음을 한정된 시간과 공간 안에서 충족시킬 수 있는 최선의 선택 중 하나는 도서관에서 서적을 빌려보는 것이다. 요 며칠은 캘리그라피 서적을 빌려서 조금씩 따라해보는 재미가 제법 쏠쏠하다. 5월의 달 감사를 표현해야 할 소중한 사람에게 마음을 전할 때 조그마한 덕질을 감사를 담아 표현해보는 것이다.
요즘에 성경 암송을 캘리로 하는 즐거움을 조금씩 경험하게 된다.
유익함의 첫번째는 우선, 암송이 단조롭지 않다.
암송에 리듬이 생긴다.
붓펜으로 하는 한글캘리그라피를 하며 뜻을 헤아리며 어절을 묶어보기도 하고,
의미를 캘리에 담아 표현해보기도 한다.
예를 들면 마태복음 십육장 일부를 암송하기 위해 써 보며
예수님이 '내'라고 자신을 표현하실 때는 다른 글씨보다 크게 쓰며 예수님의 상징을 더하는 식이다
또 말씀에서 내가 이해할 때 중요한 부분을 조금 크게 강조하고, 간단한 조사는 글씨를 작게 하여 글씨의 강약을 조절하며 의미를 전달하게 된다.
말씀을 읽거나 암송할 때 명확하지 않은 한글의 뜻을
영어를 통해 확실하게 하기도 한다. (영어는 아리까리 하지 않고 보다 분명하게 뜻을 전달해 줄 때가 있다.)
그러다 점점 욕심이 생긴다. 영어에서 나아가 라틴어나 헬라어, 아람아, 히브리어 원어의 의미를 알아보고 싶기도 하다가, 나아가 이해할 수 없는 라틴어 캘리그라피까지 써보고 싶어 블로그와 인스타를 눈팅해보는 시도를 오늘 하루에 해 본 것이다.
처음 영어 캘리까지는 그러려니 했는데, 나의 덕질은 이미 '라틴어 캘리'로 이어졌고, 프랑스어 캘리에 스와로브스키 장식을 한 것을 보며 감탄을 하고 있는 것이다. 이처럼 인터넷을 통한 SNS 검색의 확장성은 정말로 빠른 시간에 원하는 것을 찾는 즐거움을 선사하여 나의 도파민 수치를 올리는 것 같다. 하나님 안에서 허락된 시간 안에서 자유를 벗어나기 시작하는 것이다. 계속되는 검색 덕후질은 성령 안에서 마음이 불편해지고, 성령을 근심케 해 드리는 것 같다. 내가 자연스레 쓰고 이해하며 소통하고 마음을 전하고 싶은 암송 필사에서, 원문을 더 잘 이해하고 싶은 마음에서, 그 이상의 지나친 욕심이 내 마음을 가리우게 되는 것 같다. (라틴어 캘리나 헬라어나 히브리어에 대한 관심이 잘못되었다는 것이 결코 아니여라~)
내가 감사하고 더 스스로 단련하며 계속해야 할 것은 무엇일까?
그리고 내가 절제해야 하는 것은 무엇일까?
10대 혹은 20대 때의 나라면, 너무 좋아하게 될까봐, 그냥 캘리를 그만두었을 것 같다.
그런데, 지금 조금 더 하나님 안에서 성숙된 나는, 주님께서 허락된 시간 동안 내게 주신 것들을 감사하며,
자족하며 즐기며 말씀을 읊조리며 써보고, 이웃을 섬기고 싶어진다.
그리고, 그런 시간을 지속하며, 내가 더 알고 싶은 것과 알고 있는 것을 지속하는 것의 적절한 밸런스들을 찾아가고 싶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이 과정을 주님께 의뢰하며, 여쭙고 싶다. 40이 넘어서야 이런 여유가 생긴다.
그러나 내가 언제든 틀릴 수 있음을, 주님께서 멈추게 하시면 이 또한 감사하며 멈출 수 있는 나그네 정신을 소유하고 싶다.